2020-04-20 10:36 (월)
“김문수, 물 위를 걷는 사람!”
“김문수, 물 위를 걷는 사람!”
  • 관리자
  • 승인 2013.02.02 23: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문수 지사, 이외수 작가와 함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쏘다

김문수 지사와 이외수 작가가 만나 비슷한 서로의 청춘 시절을 청년들과 교감하고 있다.
“김문수와 이외수가 만나면 과연 어떨까?”

이름이 ‘수’자로 끝나고, 외모와 나이도 비슷한 데다 같은 경상도 시골(영천·함안) 출신이다. 바른말 잘하고, 끝없는 시련과 도전의 열정에다, 시대의 진정성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좋은 자리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좋은 일이란 없다. 혹여 그런 자리에 함께한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행운아다. 새해 들어 그런 행운을 걸머쥔 청춘들의 함박웃음이 울려 퍼진, 좀처럼 보기 드문 화제의 이벤트가 경기도에서 벌어졌다.

바로 그 특종 현장은 경기도가 마련한 ‘경청(京淸) 콘서트’…. 24일 저녁 경기도 청년들과 소통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로 경기도대학생기자단 1~5기, 소셜라커, 대학생광고경진대회 역대 수상자, 경기도 차세대위원회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이외수 작가가 경기도문화의전당 ‘아늑한 소극장’에서 만나 예전의 청년 시절을 돌이켜보며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이들과 교감하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은 각자 어려웠던 젊은 시절을 특유의 뚝심으로 이겨내고 현재의 자리에 우뚝 선, 그래서 함께 소통하는 기회를 가진 젊은 청중들이 곧 행운아인 셈이다.

“경기도는 강원도와 인접한 이웃 같은 느낌…”

이외수 작가는 콘서트에 앞서 경기도 대학생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경기도는 강원도와 인접해 이웃 같은 느낌이다”며 “김 지사와 특별한 인연은 없지만 평소 바른말 잘하고 안정된 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을 매스컴에서 익히 많이 들어와 친근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 작가는 대학생기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희망을 가지라”며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잠재력은 크다. 가급적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갖고 인내하라”고 당부했다.

이어 기자의 능력과 갖춤에 대해 “균형 감각을 갖고 글을 쓰길 바란다”며 “ 언제나 한쪽을 보지 말고 안팎을 다 살피되, 공정하고 균형 있는 글과 기사를 쓰라”고 좀처럼 듣기 힘든 작문의 노하우도 전수해 줬다.

또한 최근 마광수 교수가 언급한 말에 대해 “마 교수는 오랜 교분이 있는데, 잠깐 잘못 생각한 것 같다”며 “본인의 홈페이지를 통해 사담한 것 정도로 보이는데, 인터넷의 활성화 시대 때문에 갑작스럽게 전파됐다.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닌 듯하다”고 웃음을 보였다.

한편, 끊임없는 필력을 과시하는 이외수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물 위를 걷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미확인보행물체』(가제)를 준비한다고 내비췄다. 이미 작품 구상은 끝났고, 현재 자료를 수집중이라고 했다. 작품을 집필하는 데 보통 3~4년 걸리는데, 이번 작품은 내년에 끝낼 계획이다.

곁에 함께 있던 한 대학생기자가 “‘물 위를 걷는 사람’이 김문수 지사가 아닐까요?”라고 작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참으로 재치와 끼가 넘치는, 이름을 묻고 싶은 대학생기자였다.

경청 콘서트에서 젊은이들과의 소통이 돋보였다.
드디어 고대했던 경청(京靑) 콘서트가 이어졌다. 콘서트는 김 지사와 이 작가의 시련과 도전, 열정,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4기 대학생기자단 7명이 패널로 참여해 질문을 선택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아울러 사전에 나눠준 색지에 질문을 적어 날리는 질의응답 시간도 이어졌다. 이날 이 자리에서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 자체가 곧 청춘들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 어릴 때와 대학 생활 등 성장 과정은?

김문수(이하 김): 나도 가난했었다. 이외수 선생님이 더 가난했던 것 같다. 나는 그만큼 굶지는 않았다. 물만 먹고 산 적이 있긴 했다. 감옥에서 단식할 때다. 그런데, 이 작가는 자취방에서 배고팠다고 하니….

이외수(이하 이): 아버지가 교직에 계셨고, 자수성가하길 바라셨다. 대학 다닐 때부터 자립했다. 10일 동안 물로 배를 채운 적도 있다. 종교인들은 40일도 굶는다. 그분들의 내장구조나 내 구조나 별다를 건 없다.

김: 학창 시절 이외수 선생님과 좀 다른 점은 고3 때 기업 반대시위에 참가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또 대학 2학년 때 제적당한 뒤 복학했다가 71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대를 제적당했다. 그래서 염색, 봉제 등 공장 생활을 7년 했다. 그때 노조위원장을 했었고, 집사람도 노조위원장 출신이다. 나는 감옥에 2년 6개월 있었다. 아주 힘든 고문도 많이 당했다.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옳은 것은 옳다 틀린 것은 틀리다고 생각한 말 한 마디, 이런 것들 때문에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당히 타협할 수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는 내가 능력이 없는 것 같다.
오늘 와서 보니까, 이외수 작가처럼 음악이나 예술을 하듯이 조금 부드러웠더라면 고문 같은 걸 좀 덜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서당 같은 데서 배워 사람이 대나무처럼 강직하고 소나무처럼 청렴하고, 이런 것만 너무 계속 듣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은 유연성, 좀 더 한 단계 높은 그런 것들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 사실은 의외로 지사님이 겪은 일들이 지금 어느 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영국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고 전문가들은 얘기한다. 거기에 기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것은 그냥 얘기를 들을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거룩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얼마나 많은 분들이 시련과 고통을 겪고, 불의와 싸우고 일궈낸 민주주의인가를 가슴 깊이 아로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 지사와 이 작가가 콘서트를 마치고 함께한 대학생들과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이외수 작가는 스트레스를 노래로 푼다는데, 지사의 ‘힐링’에 도움을 준다면?

이: 처음에 내가 컴퓨터를 시작했을 때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기계치라서 배우는 속도가 느릴까 봐 걱정했었는데, 사면 배운다더라. 일단 사두는 것이 도움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 내가 음치라서 노래를 잘 못하는데, 그래도 해도 되는 건가.

이: 음치도 타고난 음악성이다. 오히려 창조적인 것이다. 요즘 표절을 많이 하는데, 같은 노래이더라도 아무도 표절 못하고 절대로 못 따라한다. 새로운 곡이 창조되는 것이다. 어떤 노래를 부르든 창작곡이 되므로 대단한 것이다.

■ 두 분이 고생도 많이 했는데, 사랑 얘기는 빼놓을 수 없다?

김: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감옥 갔다 나와 바로 삼청교육대 대상이었다. 그때는 삼청교육대 가면 다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노조위원장 하다가 잘렸는데, 노동부의 어떤 과장분이 피하라고 귀띔해 줬다. 그때 나는 피하고 부위원장과 간부들이 많이 잡혀 갔는데, 내 대신 잡혀 간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때 피한다고 집사람과 빵집 같은 것을 하면서 공장에 다녔다. 앞에는 빵가게이고 그 안의 다락방에 숨어 지냈다. 그 위기를 넘겼다. 그 당시 장가간 친구들과 아내들이 눈치를 주며 걱정을 많이 해줬다. 나를 숨겨주다가 일이 생길까 봐. 그래서 석 달 정도 집사람에게 가 피해 있었다.
78년 집사람과 내가 각자 노조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 청혼했다가 딱지를 맞았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그러다 감옥 갔다 온 다음부터는 좀 미안했던지 잘해 줬는데, 삼청교육대 대상이라고 하니까 그때는 무조건 숨겨 주더라.

이: 춘천 시내 음악다방 디제이 시절에 만났다. 그 다방 주인이 내게 소파를 줬었다. 그 소파는 내게 침대였고, 글 쓰는 장소였던 다용도의 소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출근해 보니 다방 안이 훤하더라. 그 의자에 우연히 집사람이 앉아 있더라. 너무 아름답고 거룩해 보였다. 한눈에 반했다. 그래서 다가가 “이거 내 의자다”라고 말했다가 엄청나게 혼났다. 다방 의자에 주인이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언쟁으로 시작됐다. 나중에 집사람이 기다리던 사람과 나가는데, 내가 쫓아가서 어깨를 톡톡 친 뒤 말을 걸었다. 그냥 보내면 놓칠 것 같았다. 그래서 “아가씨 굉장히 아름다우신데 이곳에 자주 출몰해 주시면 제가 한번 유혹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나를 좋아하게 될 테니 기왕 좋아해 줄 거면 미리 좋아해 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어깨를 톡톡 쳤던 그 살갗 부위를 도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은 사이가 좋고, 잘 살고 있다. 6개월 구애했다. 식구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김문수 지사 러브스토리는 정말 아름답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고, 또 그 사람을 숨겨줄 수 있는 사랑은 레미제라블의 사랑이다.

김: 아까 보니 사모님과 아드님이 정말 인물이 좋으시더라. 이 작가님의 외모에서 나올 수 없는 외모의 아드님이다.

이: 유전자가 바뀌겠나? 나도 자주 보면 괜찮다.

이외수 작가가 특유의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이며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 이 작가는 젊은 시절 건강에 신경을 안 쓴 것 같은데?

이: 맞다. 일반 사람들 주량을 물어 보면 3병 등 병단위로 말한다. 그런데 젊은 시절 나는 무박3일로 마신다고 했다. 그 자리에 앉아 술만 먹었다. 12년 동안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다. 지금 그래서 아내에게 100% 양보하며 산다. 지금은 거의 안 마신다. 담배도 많이 피웠었다. 평균 4갑 정도 피웠고, 글이 막힐 때는 8갑 정도 피웠다. 지금은 담배도 끊었다. 금연의 비결을 물어오는데, 정말 간단한 방법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피운다’이다. 핑계가 안 통하게 이렇게 정해 놓으면 된다.

김: 술은 잘 안 마셨고, 담배는 피웠었다.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절에 감옥에서 살다 보니 너무 억울해서 좀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담배를 끊게 됐다. 보통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담배를 피워 어지러워하며 감옥 앞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때 밖에 나가도 절대 피우지 말아야지 해서 끊게 됐다.

이: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내 주변까지 힘들어진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즐겁게 가지면 좋다. 우리나라 사람은 5를 좋아한다. 오곡, 오방, 오장, 오색, 오강 등을 좋아하는데…. 오장과 합의하는 것이 좋다. 공포, 근심, 걱정 들을 가지면 신장, 심장 등 오장에 안 좋다. 그래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즐겁게 사는 것이 좋다. 경기도 살기 좋지 않나? 자살률이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 두 분이 다 소통의 달인인데?

김: 이 작가 트위터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대단한 것 같다. 역시 이 작가가 그림도 잘 그리고,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작업을 많이 한다. 풍류·음악·미술 등 여러 가지 감성이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주로 가슴으로, 진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글을 읽었다고 하거나 여자 분이면 거의 무조건 해준다.

김: 나도 거의 ‘맞팔’을 해준다. 이 작가의 경우 소통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나는 그런 재주가 없다.

이: 다 도민을 사랑해서 그런 마음 때문에 하는 것 아니겠는가.

김: 택시 운전을 하다 보니 힘든 것을 많이 알게 됐고, 그 분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길 바란다.

이외수 작가의 청춘불패 강연 모습.
■ 두 분의 도전과 열정은 언제까지, 인생 전환점은?

이: 난 땅 속에서도 글을 쓸 것 같다.

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겠지만, 직위보다는 바르게 살자는 데 더 중점이 있다. 자리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사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이: 현재 위치는 원했던 위치에 도달한 것이 맞다. 만약에 도인이라고 해도 깨달음을 얻은 다음 산꼭대기에 그냥 앉아 있다면 성공한 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발지로 다시 내려와 젊은 환기를 할 수 있는 작가가 좋은 작가라 생각한다.
전환점은 집을 사고, 공부나 글 쓰는 것 모두 수행이라 생각했었는데, 내 개인적인 일로 글 쓰는 것 등 죄책감 때문에 후회가 많이 됐었다. 나중에 슬럼프가 와서 너무 번민하다 스스로 철창을 만들어 갇히기로 했다. 9년 동안 썼다. 그때 나온 소설이 『벽오금학도』와 『황금비늘』이다. 그걸로 인해 제2의 작가 전성기를 맞게 됐다.

김: 감옥생활이 전환점이다.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겸손해졌고, 반성하고 공부했다. 담배도 끊고…. 내게 감옥은 좋은 학교였다. 좋은 전환의 장소였다고 생각한다.

■ 살면서 제일 후회한 일은?

김: 그저께가 어머니 제삿날이었다. 39주년이었다. 어머니 소원은 늘 “문수야, 졸업하고 데모하면 안 되나”였다. 돌아가시면서도 그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20여년 후, 25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졸업장을 들고 어머니 무덤에 가 많이 울었다. 부모님께 너무 말 안 듣고 골치 썩여 드려서…. 요새 많이 느낀다, 말 좀 잘 들을 걸….

이: 수시로 후회한다. 글이란 것은 항상 흡족하지 않다. 속담이 제일 부럽다. 한 줄짜리 글이다. 작가미상이지만 수백 년이 가는 생명력이 있다. 과연 내가 쓴 소설 47권 중 속담같이 가치 있고 생명력 있게 긴 세월 가는 글이 몇 줄이나 될까 생각하면, 상당히 후회스러운 마음이 밀려온다.

■ 만약 청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김: 부모님께 잘하고 싶다. 여러 가지 면에서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싶다. 청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효도하고 싶다. 남자들이 원래 애교가 좀 없다. 지금 남학생들이 부모님께 좀 더 살갑게 잘했으면 좋겠다.

이: 지금 행복하다. 절대 안 돌아갈 것이다. 만약 돌아간다 해도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연륜과 경험이 두루 쌓여 빛을 발하는 이외수 작가.

양미라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